잊을수가 없는걸.

오늘 삼년전의 졸업엘범을 꺼내 보았어.

 

아직도 너를 잊을 수가 없어.

 

Piano Scherzo and Humanism 이라는 (보통은 pianoscherzo라고 줄여쓰지만) 필명도 너의 이니셜이였었어. 그리고 아직도

그러나 이젠 너에 대한 생각 없이도 이런 필명을 자연스레 쓴다.

 

웃고 있는 너. 3년전 파란 햇살 안에서 웃고 있었던 너.

 

난, 그 장면들을 마지막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깊이 담아보았지만, 흐려진다.

추운 겨울 입김은 공기속으로 흐려지고

대지는 차가워지고 하늘은 가슴 매여오게 시려만 진다.

 

지금 결국 남은 것은 복도에서 날 보며 빙긋 웃어주었던

장면과 교실 앞에 앉아서 물끄러미 창밖을 쳐다보던

장면 밖에는 기억이 흐릿하게 밖에 안난다.

 

유일하게 뚜렷이 남아있는 것은 졸업엘범.

 

너를 잊을수가 없는 걸.

by PianoScherzo | 2009/10/24 11:40 | 트랙백 | 덧글(0)

기억은 때론 잔인하게 .2.

그때의 공간은 시간은 닫혔다.

그러나 기억은 문틈 사이의 빛처럼

살며시 그리고 문득 새어나온다.

 

때론 혼자 쇼파에 기대 누워서

말도 안되는 상상이나 하며 웃음을 짓다가

그렇게 아프게 흘러나오는 기억들은

잔잔하게 그리고 때론 격정적이게.

 

시간은 흘러버린다.

이것을 난 아직도 깨닫지 못하였다.

그렇게도 속았으면서 그렇게도 아파했으면서

언제까지고 지금의 세상이 존재할 줄만 알다가

흘러가버리고 나서야

슬픈 소설책을 읽으면서 슬픈 음악을 들으면서

향긋한 커피를 마시면서 다소 우울한 바깥 소리를 들으면서

스스로의 정신을 정신을 놓게하는건지 가다듬는건지.

 

Time wait for no one. 시간을 달리는 소녀 .

자 내가 스스로가 정말 기뻐서 웃었던 적은 언제인가.

자 내가 내맘을 터놓고 이야기한 것은 언제인가.

잠깐의 술기운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가 아니면

인간답다는 것이 다만 허깨비일 뿐이다라는 의심만을

의구심만을 낳은 채 더도 없는 유치한 이야기를 하는

맘을 터놓는 다는 그러한 유치한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

 

기억은 그 모든 결점들을 철저한 순백으로 만든채

아름다워져만 가는데 또는 작은 아픔들도 큰 아픔으로 만든채

커져만 또는 타들어만 가는데

나는 왜.. 답답해져가기만 하는지.

지금 내가 달려가고 있는 시간들이 날

옥죄어 온다.

 

기억이 되어 버릴 시간들은 언제나 날카로운 날을 세우고

지나가버린 나날들을 다듬는건지 싹둑싹둑 베어버리는건지.

 

기억은 때론 너무나도 크게

기억은 때론 잔인하게.

by PianoScherzo | 2009/09/14 00:34 | like,,special place | 트랙백 | 덧글(0)

당신들의 보편적 정의(개신교 NO)

Intro
반박하고 싶다면 댓글로 남겨주시거나
몇 번 보내셨으니깐 아실꺼라고 믿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pianoscherzo@daum.net으로
메일을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Scherzo
가끔 사회학을 공부하다 보면 당최 동의가 쉽게 되지 않는 말들이 있다.
오늘 말하고 싶은 것은 그 중 하나.
"우리는 문화 상대주의는 인정하되 인류의 보편적 정의를 헤치는 문화까지
인정하는 극단주의로 가서는 안된다" 라는 모토.
겉보기에는 당연해 보인다. 지극히 우리가 심히 익숙한 교과서적인
명철한 말들이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호하기 짝이없다.
인류의 보편적 정의,,,, 이거 웃기다. 인류의 보편적 정의는
애시당초 '기득권층' 편하려고 만들어낸 너희들의 정의다.
수많은 예시들을 들수 있지만 오늘날 서구 문명 그리고 유럽 문명의 바탕이되는
기독교(로마 카톨릭, 그리고 개신교와 그쪽에서 갈라져 나온 엄청난 수의 종파들.ㅋㅋ)
를 살펴보자. 기독교 특히 개신교는 성경을 그들의 절대적 정의로 해석하며
문자그대로의 뜻을 받아들인다. ( 물론 그에 반해 카톨릭은 상당히 유연하게
해석하는 편이다. 이미 토마스 모어의 신학대전에서 성경은 문자 그대로 
해석되기 보다는 거기에 담긴 뜻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밝힌 바 있다.)
그리고 개신교도들 대부분은 성경이 인류의 보편적 정의를 담고 있다는 것에
당연히 동의한다. 동의안하면 쫓겨나니깐. (그리고 지옥간다지>)
그러면 자 나에게 이렇게 말하게 해달라.
"인류의 보편적 정의에는 여자는 남자에게 철저하게 순종하며
감히 성당에서 목소리를 크게 내지 말것이며 매사에 얌전해야 하며
남자의 뜻에 기꺼이 따라야 하는 것 또한 포함된다"

고린토전서 그 밖에도 수많은 구,신약 성서에서 위와 같은
내용들을 천주교인으로서는 상당히 부끄럽게도 다루고 있다. 

개신교도들에게 묻고 싶다. 이거 보편적 정의입니까?
남녀 상관 없이 자신있게 넵 이라고 대답한다면 할말이 없다만
그렇다면 남녀 불평등이 인류 보편적 정의가 되는데
그럼 뭐가 인류 보편적 정의에서 벗어난다는 건지는 역시 모호하다.

위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노예들을 산제물로 바쳤던 잉카 문명
또한 종교적인 관점에서 당연히 보편적인 정의였다.
인간은 당연히 그들의 신들에게 정기적으로 제물을 바쳐야
했으며 이것이야말로 그들의 보편적 정의이자 '성서'였다.
(남녀불평등을 외치는 성서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아 물론 그렇게 반박할 수도 있겟다.
그래서 PianoScherzo는 살인이 보편적 정의일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나의 대답은 물론 지극히 현대적인 교육을 받은 우리들의
관점에서 아니오 이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개신교신자라면)
당신은 남녀불평등이 인류의 보편적이라고 그럼 생각하세요? 라고
반문하여 당연히 아니지 라고 대답하는 개신교 신자를 죄송하게도
그들만의 지옥으로 빠뜨려 버릴 수도 있으며 현대에도 살인은
무수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할 수도 있다.
하루에 몇명의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며 병들어 약도 없이 죽어가며
물이 없어 죽어가며 전쟁으로 핍박으로 죽어가는 줄 아는가?
수도 없이 많다. 이것은 소위 '전세계 상위 10%' 계층으로 분류되는
내 주위 대부분의 사람들을 비롯한 우리들에 의해 일어나는 살인.
우리가 직접 죽이지 않으나 그들의 무수히 스러져가는 생명을
바탕으로 누릴 수 있는 풍요이다. 우리의 풍요는 반대편의
당신을 처참하게 굶겨 죽인다. 물론 눈에 안보이니깐, 염려 마라.
어쨋든 이것 또한 살인이다. 인류의 보편적 정의에서 벗어난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의 60%를 그들과 나눌수 있는가?
(여기서 상위 10%란 한가정에 차가 한대 이상 있고 휴대폰이
한명 이상 있으며 집에 전기가 일주일에
4일 이상은 공급되는 계층을 의미한다. 의외로 10%안에 들기가 쉽다.;;)
 
(몇몇 조사에 의하면 상위 10%계층이 누리는 물질적 풍요의 반만
나누어서 하위 90%의 사람과 나누어도 모두 의식주 문제 없이
풍요롭게 누릴 수 있다고 한다.)

죄송하지만 별로 없을 것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말 그대로 우리는 그들의 생명을 먹고 사는 샘이다.
그리고 우리는 잉카 문명보다 훨씬 많은 양의 목숨을 살해하고 있는 셈이다.
단지 안보이니깐 깨끗해보일 뿐이지.

난 제발 사회학이 지극히 교과서적으로만 나가지 않았으면 좋겟다.
사회학은 말 그대로 사회를 배우는 학문.
극단적 상대주의란게 있을 턱이 없다.
사회를 바라보는 틀을 그리고 그 사회의 사람들이 생각했던
틀들을 바라보는 것이지 애매모호하게
인류의 보편적 정의가 어쩌구 하는 학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반박글은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전 이만 자러 슝슝,
(여긴 지금 새벽 1시 ㅃ)


추가/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보편적 정의란 것은
성서에 의해선 남자들의 보편적 정의로 해석되어 오기도 하였으며
부르주아에 의해 여자와 아이들을 배제한 보편적 정의로
해석되기도 하였다는 것, 즉 보편적 정의의 발전과정은
그들의 권리를 충족시키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서 기능하였다는 것.,

by PianoScherzo | 2009/09/06 09:56 | like,,special place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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